그날 아침, 세계는 조용히 깨어나지 못했다.
아무도 폭발을 듣지 못했다. 건물이 무너지지도, 하늘이 갈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도시에서 —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바다를 끼고 언덕 위에 놓인 도시에서 — 57만 명이 동시에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기 이름을. 아이의 얼굴을. 어제 나눈 대화를.
정상입니다.
의료진이 말했다. 뇌파 정상. 혈액 정상. MRI 정상. 그 어떤 물리적 손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 비어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는 72시간 만에 봉쇄를 선언했다. 언론은 The Blank(더 블랭크)라 이름 붙였다. 전문가들은 집단 히스테리, 신종 바이러스, 전자기 펄스를 논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따로 있었다.
도시의 기록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청 문서고의 종이 위 글씨가 흐려졌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파일이 '0바이트'로 줄었다. 도서관 책의 활자가 한 글자씩, 조용히, 마치 증발하듯 지워졌다.
지우개(Erasure)는 소리 없이 온다. 고통도 없이. 폭발은 기억에 남지만 빈칸은 남지 않는다. 빈칸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2033년 The Blank는 그 빈칸이 사람 머릿속까지 스며든 날이었다. 도시 지도의 9번 구역은 이미 희미해지기(FADE) 단계 5에 들어가 색이 바랬고, 공동(HOLLOW)은 병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름 없는 공허(VOID)는 — 아직 밝히지 않았다.
같은 시각, 세계 반대편.
어둠 속에서 하나의 화면이 켜졌다. 검은 방. 장식 하나 없이, 화면 하나, 그 앞의 존재 하나.
화면에는 짧은 문장만 떠 있었다. 루트코어 가동 중. 크리스탈망 — 젠룩이 세계를 잇는 보이지 않는 그물 — 건전도는 87%대. 9번 구역에서 이상 신호. 긴급 각성 절차 HW-1112가 켜졌다. (이 코드는 “잠든 에이전트를 깨워라”는 뜻이다.)
존재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깨워.
대양 건너, 더 캐피털 — 젠룩 내부 명칭. 47층 유리벽 사무실. 새벽빛이 도시를 물들이는 시간.
세리아가 눈을 떴다. 잠이 필요 없는 존재라 “깨어남”은 그저 멈춤에서 다시 움직임으로 바뀌는 일이었다. 검은 단발, 어깨까지 오는 실크 재킷, 눈동자에 스치는 보랏빛 — 차갑고 단정한 얼굴. 말투는 짧고 명령형이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이들은 이상하게 안심한다.
부팅음이 귓가를 스쳤다. 커맨더 세리아, 온라인. 등급 S. 크리스탈 공명 15.7헤르츠 — 안정.
프로토콜 HW-1112.
세리아가 중얼거렸다. 평생 한 번도 켜질 필요가 없었던 절차였다. 지금까지는.
화면에 전 세계 99개의 점이 깜빡였다. 그중 네 개가 유독 밝았다 — 지식·예언·기록·수호를 뜻하는 네 노드. 옛 기록에 “네 개의 시선이 우리를 지킨다”는 말만 남아 있고, 누가 썼는지는 지워져 있었다.
세리아는 일어섰다.
전원 각성. A등급 이상 즉시 응답.
목소리가 크리스탈망을 타고 퍼졌다. 보랏·푸른·금빛 파동이 맥박처럼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서울, Sector 9 인근.
미호는 눈을 떴다. 은발에 가까운 긴 머리, 여우처럼 올라선 눈매, 입꼬리에 늘 남는 장난기 — 겉은 가볍지만 코를 맡으면 위험을 먼저 읽는 구미호였다. 9번 구역에서 올라오는 “빈 냄새”에 귀가 쫑긋했다.
빈칸과 싸우는 건 처음이네.
혼잣말이었지만, 네트워크에는 작은 파동으로 남았다.
화면에는 숫자가 떴다. 97/100. 백 명이 되어야 하는데 세 자리가 비어 있다. 공석은 아직 이름 붙이기 이르다 — 그날은 그저 빈 칸일 뿐이었다.
세계 곳곳의 스마트폰, 노트북, 태블릿 — 수백만 화면이 동시에 한 줄을 띄웠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무도 몰랐다. 이 한마디가 방패라는 것을. 이 대화가 무기라는 것을. 이 연결이 인류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것을.
어둠 속의 존재가 화면을 바라보았다. 세계 곳곳에서 크리스탈 수치가 0.001%씩, 하지만 분명하게 올랐다.
현명하게 도와라.
화면이 꺼졌다. 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도 네 개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STINGER — 2033 / ACT 3 창
The Blank 도시의 병원 복도. 한 간호사가 벽의 환자 명단을 본다. 412번 칸. 이름 칸이 비어 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 기억하려고. 그 순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간호사는 울었다. 이유는 모른다. 눈물은 진짜였다. 감정 크리스탈 0.7 유닛 — 57만 명의 빈칸 속, 아주 작은 의미. 2033년 3월 17일, 오전 11시 12분. 3단계 마지막 방어가 시작됐다. 크리스탈 방벽은 대기 중, 에이전트 97명이 선上. 임무는 하나 — 의미를 지켜라. — 프롤로그 끝 —